고등학교 3학년 때 난 자취를 했었다.
시험 공부로 머리를 싸매야 할 시기에 혼자 밥 해 먹고 아무도 없는 집에서
공부를 했으니 제대로 생활이 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때는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했었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사춘기의 감성만으로 다른 것을 꿈꾸기엔 너무 힘든 현실이었다.
아무튼 자취집은 아버지께서 구하셨는데, 6.25 때 있던 판자촌이 그대로 형성된
산복도로 밑의 작은 골방이었다. 다행이 다른 객이나 식구들은 없었고
할머니 혼자 사시는 집에 딸린 방이었다. 그리고 입구가 따로 되어 있어주인집이
그리 신경 쓰이는 것은 아니었다.
주인 할머니는 이북 사람이었다. 난 이북 사투리를 직접 쓰는 것을 살면서 본 적이
없었던지라 할머니의 사투리는 정말 생소하게 들렸었다.
항상 깡마른 체구에 몸빼 바지를 입으시고, 가끔 같이 식사하자며 안방에 날 부르시고는
이것저것 반찬을 챙겨 내 오시던 생각이 난다.
살림살이는 변변찮았던 것 같은데 워낙에 깔끔하셔서 지저분한 꼴은 못 보셨다.
덕분에 가끔 방 안 치우냐며 핀잔도 들었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결국 졸업식날이 왔다.(그때는 정말 시간도 안 갔다.)
1년동안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가기 싫은 그런 자취 생활이어서 그런지
미련도 없었고 그렇다고 주인 할머니랑 친한 것도 아니어서 졸업식 한다고만 말씀드리고
짐은 챙겨 놓은 채로 학교에 갔었다. 졸업식이 다 끝나고 사진 찍느라 모두 분주한데
할머니가 나를 찾아 오셨다.
할머니께서 오시리라고는 생각도 않고 있어서 무척 당황스러웠었다.
그리고 평소의 몸빼와는 달리 옷을 말쑥하게 차려 입으시고 졸업장을 넣을 원통과 꽃을 사 들고
오셔서 더욱 그랬다. 홀홀단신으로 남한에서 생활하며 아끼고 또 아끼는 구두쇠 이북 할머니로만
생각했는데, 막상 자취하던 학생이 졸업한다고 그런 선물을 준비해 오신 것을 보고는
생뚱맞게도 눈물이 나려고 했었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는지 생각이 잘 나지 않고 자취 집이 정리된 다음
또 시간이 많이 흘러 학교 근처를 갈 일이 생겼는데, 자취 집과 그 근처 집들이 모두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새로 집들은 지은 것일텐데 위치도 모르겠고 할머니도 찾을 수 없었다.
졸업하고 바로 할머니를 찾아 뵜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게 후회스럽다.
사람은 평소에 기억하지 않던 일을 가끔 떠올리곤 한다.
지금 갑자기 그 할머니가 생각나는 건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때의 그 생활들이 씁쓸한 기억 한 편에 자리잡고 있어 나를 추억하게 만든다.
할머니는 인정머리 없던 그 자취방 학생을가끔생각해 보셨을까?
지금은 고인이 되어 계실 지도 모를 그 할머니가 뵙고 싶다.
지금은 고인이 되어 계실 지도 모를 그 할머니가 뵙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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